수목감별 44. 물푸레나무

2025. 6. 26. 22:21수목감별 표준수종/수목감별 120종

 
수목감별 44. 물푸레나무

봄비가 그친 아침, 갓 피어난 여린 잎들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청명하기 그지없는 나무, 바로 물푸레나무입니다. 이름부터 참 예쁘지 않나요? ‘물을 푸르게 만드는 나무’라니. 옛사람들이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정말 물이 푸른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붙여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 꺽어보고 싶지만, 안되겠지요?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 전국의 산기슭이나 계곡 주변에서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우리에겐 참 친숙한 낙엽 활엽 교목입니다. 보통 10~15m 높이까지 훌쩍 자라며, 시원하게 뻗은 줄기와 단정한 수형이 매력적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지만, 그늘보다는 햇볕을 더 좋아합니다.

꽃과 열매

물푸레나무의 꽃은 4~5월경, 새 가지 끝에서 피어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소박한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암수딴그루 또는 암수한그루로, 연한 녹색을 띤 자잘한 꽃들이 원추꽃차례로 모여 달립니다.

같은 물푸레나무과지만, 5월에 나무 전체를 새하얀 쌀밥처럼 뒤덮는 이팝나무의 화려한 꽃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다릅니다. 이팝나무가 기다란 흰색 꽃잎을 풍성하게 자랑하는 반면, 물푸레나무는 꽃잎이 없이 4개로 갈라진 꽃받침과 수술, 암술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꽃이 핀 것인지 알아채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수수함과 절제미가 물푸레나무만의 진정한 매력입니다.

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여 9월경에 익어갑니다. 물푸레나무의 열매는 시과(翅果), 즉 날개가 달린 열매입니다. 길이 2~4cm 정도의 길쭉한 주걱 모양으로, 날개 끝에 씨앗이 한 개 들어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겨울까지 마른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면 비로소 어미 나무를 떠나 헬리콥터처럼 뱅글뱅글 돌며 머나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더 넓은 세상에 자신의 후손을 퍼뜨리려는 자연의 경이로운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물푸레나무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잎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하나의 잎자루에 여러 개의 작은 잎(소엽)이 새의 깃털처럼 달리는 홀수 1회 깃꼴겹잎(기수1회우상복엽) 형태입니다. 보통 5~7개의 소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끝에 달리는 소엽(정소엽)이 옆에 달리는 측소엽들보다 크기가 조금 더 큰 것이 특징입니다.

소엽 하나하나는 길이 6~15cm, 너비 2.5~7cm 정도의 달걀 모양 또는 넓은 피침형이며, 끝은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얕은 톱니가 있습니다. 잎의 표면은 짙은 녹색으로 매끈하지만, 뒷면은 연한 녹색을 띠며 잎맥 위에 미세한 털이 나 있기도 합니다. 가을이 되면 맑고 깨끗한 노란색으로 단풍이 들어, 주변까지 환하게 밝혀줍니다.


수피 

어린 물푸레나무의 수피는 비교적 매끈하고 회백색 또는 회갈색을 띄며, 마치 자작나무처럼 잿빛이 도는 흰색의 불규칙한 얼룩이 생깁니다.  하지만 긴 세월을 견뎌낸 늙은 나무의 줄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거칠고 두꺼워진 껍질은 짙은 회갈색으로 깊어지고, 세로로 깊은 골이 파이면서 마치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으며 겪어온 인고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조경 및 이용

물푸레나무는 단정하고 시원스러운 수형과 깨끗한 느낌의 잎, 그리고 가을의 고운 단풍 덕분에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의 조경수로도 사랑받습니다. 특히 병충해에 강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견뎌 도심지에서도 잘 자랍니다.

목재는 매우 단단하고 질기며 탄력이 뛰어나 예로부터 귀하게 쓰였습니다. 옛날 죄인을 다스리던 곤장이나 농기구인 도리깨를 만들었고, 현대에 와서는 야구방망이나 테니스 라켓 등 고급 운동기구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또한, 껍질은 '진피(秦皮)'라 하여 한약재로도 쓰였다고 하니,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고마운 나무입니다.


마무리하며

물푸레나무의 시간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수피입니다. 어릴 적 매끈하고 말갛던 표면은 세찬 비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점차 깊고 단단한 무늬를 새겨 넣습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청춘의 티 없던 얼굴에 하나둘 주름이 새겨지고, 겪어온 시간의 흔적이 인상으로 남듯 말입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세월만큼 깊어진 물푸레 나무의 수피를 보며, 진정한 멋과 품격은 시간이 장시간 빚어내는 작품임을 겸허히 배웁니다.